암호화폐 이해를 위한 간략한 화폐사

Hyunwoo Han
8 min readFeb 2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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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가치를 보장하기 위한 정부와 은행이 존재하지 않는, 화폐. 이것이 비트코인의 지향점이다.

(정부와 은행을 이후에는 간략하게 하기 위해 ‘중앙주체’라 표현하겠다. 비트코인의 의의가 탈중앙화에 있기 때문에 그에 반대되는 중앙주체라는 어휘를 사용했다.)

위의 말을 뜯어보자. 화폐의 가치를 보장하기 위해 중앙주체가 왜 필요할까? 그렇다면 화폐의 가치는 어디서 오는지, 화폐의 정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까지 내려가야 한다.

흔히 화폐의 역할(그리고 역할들의 집합으로 정의되는 정의)은 거래의 매개, 가치의 저장, 가치의 척도라고 한다.

화폐는 물물교환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사회적 약속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쌀, 소금 등 그 시대의 필수재가 화폐 역할을 하다가 그 뒤에는 귀금속인 금, 은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각국중앙은행이 찍어내는 지폐가 화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화폐의 역할을 해왔던 것들과 지금 화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지폐 간의 비교를 해볼 수 있다.

소금, 쌀. 그리고 금까지. 이는 실물이다. 엄밀한 어휘로 표현하자면, 그 자체로 내재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소금, 쌀, 그리고 금속은 화폐(즉, 거래의 매개 수단 등)로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다. 실물을 화폐로 사용하는 사회는, 물물교환의 틀을 유지하되(물건과 물건을 거래한다는 점에서) 화폐가 부재하는, 1대1 물물교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 간에 약속을 한 것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1대1 물물교환의 한계는 다음예시를 통해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다. 사회에 총 n개의 물건이 있고, 화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총 nC2개의 물물교환 쌍이 가능하니, 각 쌍의 시장으로 전체 재화가 분산되는 만큼 시장이 얇아지는 반면, 하나의 기준을 제공할 수 있는 실물이 있다면, 총 n-1개의 시장이 형성, 각 시장을 보다 두껍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시장이 두껍다는 것은 보다 거래가 활발하고 용이하게 이뤄지는 시장을 뜻하는 표현이다!)

굳이 실물화폐라는 개념을 소개하고 저 안에 내재가치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폐와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지폐. 50,000원짜리 한장. 혹은 50달러짜리 한장. 이 지폐를 들고 피자 가게에 가서 피자 한판과 “교환”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피자 가게 사장님도 그 종이에 피자 한판에 상응하는 “가치”가 있다고 “인정”을 했기 때문이다. 모든 교환, 거래의 기본은 양쪽 의사의 일치이다. 보다 일반화하자면 내가 지폐를 들고 어디를 가든(50,000원짜리면 우리나라 안이어야 하고 50달러짜리면 미국 어딘가여야 하는 한계는 있다) 충분한 양의 종이만 들고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살 수 있다. 이러한 경제시스템에 우리는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지만 사실 한번쯤 질문을 던져볼만하다. 그 지폐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모두가 인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 우리가 이를 실물화폐가 아닌 “법정화폐”라고 지폐를 명명하는 이유가 있다. 법정화폐는 국가가 정한 법률에 의해 그 가치가 보장되는 화폐를 의미한다. 조금 거친 말로 하자면, “법이 그렇게 정했으니 그냥 믿고 이용해라”가 된다. 근데, 법이 그렇게 정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고 따를가? 다른 것도 아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관련된, 예민한 문제인데. “오늘부터 이 종이에는 피자 한판의 가치가 있으니, 이거 쓰세요”라고 정부가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쓸까? 물론 그렇지 않다.

지폐에도 역사가 있다. 태환지폐에서 불태환지폐로 넘어왔다고 요약이 가능한 역사이다. 지폐에 대한 완전한 신뢰가 형성되기 이전에는 지폐는 어디까지나 “교환권”이었다. 달러의 경우, 금과 교환 가능한 교환권이었다. 은행에 가서 지폐를 주고 금으로 교환해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금으로 바꿔줬다. 만약 그렇다면, 사람들은 비록 지폐 자체에는 내재가치가 없지만(지폐는 어디까지나 종이일 뿐이다) 그것을 언제든지 금으로 교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지폐는 금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대부분 불태환 지폐이다. 태환지폐에서 불태환지폐로의 이행과정은 여러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맥락이 있으니 생략하지만, 요즘 50,000원짜리 지폐를 갖고 금시장에 가서 시세로 금을 구매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은행에 가서 금으로 교환해달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제는 교환권이 아니다. 그리고, 지폐의 가치는 순수하게 법률이 정한대로, 그리고 그 법률을 믿고 따르는 사회 구성원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금을 이용한 화폐시스템에서 순수한 지폐 화폐 시스템으로 넘어온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불태환 지폐에서 이 모든 논의를 중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상생활을 돌아보자. 삶에 녹아들어있는 수많은 거래행위를 할 때, 직접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건네주는 빈도수와 신용카드, 송금 등을 이용하는 빈도수 중,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현금자산 대부분은 개인들의 은행계좌에 숫자로서 표시되며 이러한 정보는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전자적으로 저장된 숫자들이, 이제는 지폐에 대한 교환권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내 계좌의 내용을 은행에 가서 증명하면, 그 범위 내에서 돈을 인출하거나 송금, 이를 장부에 기록하는 방식으로 거래가 일반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먼길을 돌아왔지만 우리의 최초의 질문은 “화폐의 가치를 보장하기 위한 중앙주체가 왜 필요할까?”이다. 여기서의 중앙주체는 법률, 중앙은행, 상업은행 등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면된다.

우선, 중앙은행 혹은 정부, 보다 근본적으로 법정화폐의 가치를 보장하는 “법률”이 필요하다는 점은 정의상 자명하다. 법으로써 그 가치를 보장하는 화폐니까, 법률이 필요하다. 본질적으로 법률은 국민의 위임을 받은 대리인들에 의해 제정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의회라는 중앙주체에 의해 제정된 것이다. 고로, 중앙주체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법률에 따라 지폐발행 그리고 이를 통한 통화량 조절 등에 전권을 쥐고 있는 중앙은행도 하나의 중앙주체이며, 지폐가 유통되기 위해 이를 발행하는 기관이 필요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다.

또한, 일반인들이 가장 흔히 접하는 상업은행 또한 필요하다. 이들이 자금중개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 사회처럼 실물 지폐가 오가는 대신 전자정보가 오가는 시기에는 더더욱 필요하다. 갑이 을에게 5만원을 송금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은행은 송금을 하고자 하는 사람의 계좌에 충분한 액수가 있는지 확인한 후, 조건을 만족한다면, 자금을 송금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수취인은 은행이 이와 같은 과정을 감독하고 보증하기 때문에 상대로부터 실물지폐가 아닌, 자신의 계좌에 단순히 늘어난 숫자만을 보고도 경제적 가치를 건네받았음을 인정한다. 가령 갑이 5만원이라는 돈을 소유하고 있지 않음에도 을에게 은행을 통해 5만원을 송금했다면, 그리고 그 거래가 정상적으로 은행에 의해 처리가 되었다면, 그 피해 혹은 법적분쟁은 갑과 은행의 문제이기 때문에(을이 급부를 수령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귀책사유가 없다는 조건이 법적으로는 필요하지만 이는 우리가 현재 고려하는 맥락에서는 무시해도 무방하다. 갑이 문제를 일으키는 상황을 보는거니까) 을의 입장에서는 큰 걱정없이 이러한 거래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은행은 이러한 이해관계 때문에 자금중개에 있어 본인의 역할을 성실히 다해야만 하는 유인이 생긴다. 이러한 구조에 의해 은행에 의한 자금거래는 안정성을 갖출 수 있다.

하지만, 상업은행과 같은 중개기관이 없고 개인들끼리 금전거래를 한다고 해보자. 현대 사회와 같이 전자화된 세계에서 거래하는 경우를 가정 시, 문제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이중지불문제”라고 하는 문제가 있다. 가령 계좌에 5만원이 있는데, 이를 갖고 을과 병에게 이중으로 5만원을 송금했다고 하자. 갑의 컴퓨터 안에 있는 전자지갑에서 5만원에 해당하는 정보를 복사하여 각각 을과 병에게 총 두번 보내는 상황이 될 것이다. 이를 검증할 수 있는 다른 주체가 없기 때문에 을과 병은 자신이 받은 전자정보가 5만원의 가치가 있는지를 신뢰할 수 없다. 설사 갑이 5만원을 소유하고 있고 을에게만 5만원을 송금하는, 전지전능한 입장에서 봤을 때 신뢰할 수 있는 거래라 하더라도, 갑은 을에게 본인은 믿어도 되는 주체임을 설득하는데 굉장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본인의 계좌를 을에게 전송하여 5만원 이상이 계좌에 있음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을은 갑의 계좌내역이 조작된 것인지 아니면 실제인지 판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 계좌는, 이 거래를 관리 감독하고, 책임지는 은행에 의해 관리되는 계좌가 아닌, 전적으로 갑이라는 개인에 의해 관리되는 계좌이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은 이러한 개인들 간의 거래관계에서, 중앙주체가 필수적으로 필요한 시스템에서 벗어나, 개인들 간의 거래(p2p거래)로만 구성될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왜 중앙주체 없는 생태계를 구축하려 하는가? 기존 시스템의 어떤 부분에서 문제의식을 느꼈던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생태계는 어떠한 기술을 통해 구현할 것인가? 이는 사실 여러 공학적인 아이디어, 보다 깊게는 수학적인 아이디어가 뒷받침하는, 일종의 종합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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